Defensive M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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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시대의 신체와 그로테스크 이미지

- 손종준의 <defensive measure>에 대하여

 

강 수 미 (미학)

 

인간 신체가 기계장치와 병합할 수 있다는 공상 과학 영화 같은 상상은 우리를 곧장 두려운 이미지로 이끈다. 그런데 사실, 현재 우리 일상에서 몸은 끊임없이 각종 기계장치와 관계를 맺거나 심지어 장치에 잠식된 채 그 문명의 이기(利器)가 가져다주는 생활의 편리함에 길들어있다. 가령 당신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 당신 기억을 대신 저장하고 있는 핸드폰과 컴퓨터 메모리 칩, 당신의 공간지각을 조직하고 있는 내비게이션. 이 장치들은 이미 당신과 한 몸이며 이제 당신은 그것들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이러한 기기들이 내 몸과 병합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탈착이 가능한 부속품이며, 나를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각적 ․ 인식적 풍요를 확장시키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손종준의 사진들에서 가장 먼저 눈을 자극하는 것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기계장치이다. 은색의 견고한 금속 조각들이 볼트와 너트로 극히 단순하게 접합된 이 정체 모를 장치들은 사진 모델의 몸을 둘러싸는 식으로 부착되어 있는데, 부드러운 단백질 피부와 오밀조밀한 형태로 이뤄진 인간 유기체에 대비되면서 더욱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효과 때문에 우리는 손종준의 사진을 보며 새삼 인간과 기계의 병합 혹은 각종 장치에 포위된 현재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여기에 이 작가 작업의 미덕이 있어 보인다. <defensive measure>라는 사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손종준은 자신이 만든 이 생경한 기계장치들을 ‘방어 도구’로 상징화했다. 그런데 사진 속 그 장치들은 구조적으로 보면 머리에 씌워져 두개골과 안면을 보호하거나 어깨와 팔에 부착되어 보호대 구실을 하는 한편, 세부적으로 보면 금속 표면에서 화살촉처럼 생긴 것들이 예리하게 솟아나 있어 공격용 무기 구실을 한다. 이를테면 사진 속의 이 낯선 기계장치들은 단순히 ‘방어의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인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방어이자 공격 수단인 것일까? 작가의 사진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defensive measure> 시리즈 중 한 사진의 모델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검고 단단한 피부를 가진 남자이다. 모델의 이와 같은 신체적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저 먼 아프리카 원주민과 그들의 야생적 삶을 떠올리게 한다. 문명화되지 못했다거나 미개하다는 가치 평가적 의미가 아니라 보다 자연에 가깝고 태생적으로 주어진 몸 그 자체라는 현상학적 의미에서 그렇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자연 상태로도 완벽한 모델의 몸은 앞서 우리가 묘사한 손종준의 기계장치를 마치 ‘보철도구’처럼 착용하고 있다. 검은 육신의 여러 부분에 장착되어 있는 이 장치들의 용도는 사진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사진의 심미적인 효과를 위한 소도구처럼 보이는 이 은색 기계장치들의 용도, 작가가 이 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시리즈의 다른 사진들과 함께 읽을 때 파악할 수 있다. 손종준은 <defensive measure>를 한 장의 완결된 사진작품으로만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수행한 후 그 자료사진의 형식으로도 제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모델은 도시인의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위에 문제의 그 기계장치를 장착하고 도쿄 시내를 배회한다. 사람들과 뒤섞여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델의 둘레로는 일종의 결계(結界)처럼 방어 지대가 생기고, 모델이든 타인이든 양자 모두 서로에게 소원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은색 기계장치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시각적으로 생경하고 그로테스크해 보이기 때문에 대도시 행인들은 그 남자 모델 가까이 접근하기를 꺼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관계가 좁혀질 수 없었던 이유는 장치의 적나라하게 공격적인 형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충돌의 가능성, 또는 신체적 위험의 가능성을 촉각적으로 상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밀집한 채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대도시의 속성상 사람들의 몸과 몸은 자의든 타의든 접촉과 충돌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손종준의 사진 속 퍼포머는 그 눈에 띄게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장치를 착용함으로써 타인을 밀쳐내고 상상적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들, 궁금증들이 풀릴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리는 각종 테크놀로지 기계장치를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내 본원적 신체 지각과 세계 경험을 위축시키기 않은 채 다만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뿐인가? 손종준의 사진을 보건대, 우리는 그렇게 자율적으로 기계장치와 관계 맺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에서 은색 기계장치라는 극단으로 표현됐지만, 사실 그 장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매체 또는 도구들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선택적으로 탈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제 2의 피부’ 또는 ‘제 2의 감각기관’처럼 우리 몸에 달라붙어 있으며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와 맺는 인식적 ․ 감각적 관계를 재편한다. 그 재편의 의미가 둘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즉 손종준의 사진 속에서 기계장치들은 무엇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이라는 것인가 질문했을 때, 그 답은 곧 그 장치들이 우리 바깥의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잠재적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그 장치들을 통해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행사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병합돼 있는 각종 장치들(여기서 장치는 단순히 기계장치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 기구, 제도, 물리적 형식을 포괄한다.)은 우리를 타인과 융화시키고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더욱 내밀하고 폭 넓게 한 것이 아니라 극히 자기 폐쇄적이고 사물화된 관계로 재편했다는 것이다. 손종준이 기계장치를 쓴 그로테스크한 인간 신체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읽어내기를 기대한 메시지는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defensive measure>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 또한, 조형적 테크닉보다는 이 텍스트성, 즉 첨단 장치들에 익숙해진 우리가 과도하게 방어적이고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타인을, 세계를 소외시키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소외돼 있음을 말하는 데 있을 것이다.

 

 

 

안과 밖 그리고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들

김 노 암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이것은 조각인가 오브제인가 설치인가? 아니면 퍼포먼스인가? 장치물들이 주는 효과는 무엇이고 어떤 (미적)기능을 하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겉으로 솟아오르는 것들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깊이 가라앉는 힘이 작동한다. 하나의 작품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이 두 상반되는 힘이 특이성을 지닌 융합과 충돌의 과정을 지나거나 동시적으로 작동해야한다. 기성의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선택과 배제를 통해 미적인 대상만을 포착하는 것은 다르다. 조형적 표현의 기술이나 관례는 기술적이며 정량적인 수준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그리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작가나 작품의 심층적 의미나 구조 또는 무의식의 구조와 경향을 추론할 수 있다.

손종준의 작업에 대한 표층적 수준의 분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이렇다.

기본적인 금속재료와 반복적 과정으로 구성된 오브제 또는 장치물은 장인적 집중과 끈기의 전통을 떠올린다. 거의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까닭에 작가의 개인적 성격과 노동의 끈끈한 점성과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제작된 결과물들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 작가의 개인적 이력을 떠올리게 하고 또 그 장치물의 형태적 기원과 관습의 문화적 코드를 떠올리게 한다.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유혹하는 장치물의 외형적 인상은 상대적이며 임의적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해석이나 의미는 자유롭게 부유하며 작품을 보는데 있어 감각적인 참조물이 된다.

조형적 결과물은 이를 착용한 사람들의 사진이미지로 변용, 재생산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 장치물들은 사진 속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주문자생산방식의 결과물이다.

금속 장치물이 변용되고 그것을 착용 또는 부착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과 태도 그리고 그의 시선은 고독하다. 누군가는 섬뜩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 표현은 우리 분야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어 그 상투성으로 인해 작품과 그 이미지를 투명하게 보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이 투명하다거나 그 의미를 투명하게 응시한다는 식의 표현 또한 하나의 은유일 뿐이다.

번쩍이는 금속의 갑옷을 입은 인물들이 무채색의 지루한 일상 공간에 기이한 분위기를 만든다. 마치 잘 연출된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특이한 복장 또는 장치물을 뒤집어 쓴 이들의 출현은 그를 둘러싼 나머지 모든 것을 배경이나 어떤 의도로 조작된 것 세트장처럼 바꿔버린다. 하나의 오브제, 한 사람, 한 사건의 출현은 단지 그 개별적 대상이나 사전에 국한되지 않고 생활환경과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뒤틀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분류 후에 우리는 그럼 이제 이것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이고 또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주제는 점점 더 불투명해졌다. 아니 담론과 공론을 통해 소통하기가 더 난해해졌다. 이러한 주제를 둘러싼 불투명함이 작업을 풀어갈 키워드가 무엇인지는 오늘날 매우 중요해졌다. 무한한 언어와 논리의 풍요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접촉과 소통의 빈곤을 느낀다.

그의 작품에는 조직과 사회에서 떨어져나가는 개인의 심적 불안과 집착,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심적 계기들이 반영된다. 우리는 굶주린 것이 아니라 소외된 것이다. 소외의 주체와 객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역할을 매번 바뀌는 것이다. 일종의 놀이이고 게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어떤 약속, 게임의 법칙이 있어야 가능하다.

시각적이며 동시에 촉가적인 공격성은 그 초점을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로,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된다. 이러한 양가적 공격성과 방어적 태도가 작품이미지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만든다. 매우 관례적인 조형적이며 문화적 전통을 따르면서 근래 작가들의 화두가 되는 이슈들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미적이란 결국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자아와 주체의 문제와 통합되기 마련이다.

마치 사회조사연구원처럼 평범한 회사원이나 노동자처럼 일하는 작가의 외형적 모습과 리듬감은 그의 손을 떠나오는 특이한 장치물들과 대조를 이루며 주의를 끌게 된다. 이러한 존재감과 흡입력이 그의 연속되는 작업의 스토리와 메시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술은 개인의 손을 빌어 나오지만 궁극에는 사람들의 보편성과 맞닿아 있게 된다. 작품은 개인의 밖에서 구조되는 것이다. 밖의 소리이고 그 반향이다. 이는 관계와 소통, 고립과 개별적 존립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과 메시지들로 구성된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것인가.

 

이 진 명 (큐레이터)

 

작가 손종준의 이력은 우리에게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작가 작업의 위세를 느낄 때마다 앞으로의 귀추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확신 가는 부분이 많다. 손종준은 알루미늄이라는 금속성 물질을 인체와 결합시키는 이채로운 조각 작품을 선보여왔다. 작가의 작품은 인체라는 대상이 반드시 선결조건으로 포함된다. 그의 작품은 인체를 방어하는 기제(機制)로서, 인체라는 주체를 보완하는 보족적 수단(complimentary mean)으로서, 그리고 주체를 방어하는 보호자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상징이지 그 자체가 지시하는 미적 완결이라든지 미적 즐거움과 같은 형식과 효과는 차후의 문제가 된다. 작품을 제시하면서 작품 자체가 지닌 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유인적 기제(co-optive mechanism)라는 점이 다른 작가와 손종준 작가를 구별 짓게 하는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이러한 작품의 시리즈 이름은 근래 한국 미술계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데, 바로 '자위적 조치(defensive measure)'라는 시리즈였다. 자위적 조치란 말 그대로 군사적 용법을 떠올리게 한다. 적이나 타자로부터 나를 스스로 지킨다. 이 원칙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사전적 예방에 있다. 상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제하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가리켜 '자위적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갈릴리 원정을 택한 것이나 시황제가 시행했던 만리장성의 축조, 현대 미국의 테러 국가 지목은 대표적인 자위적 조치의 비근한 예시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 집단적 규모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 개체에서도 자위적 조치를 엄밀하게 작동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작가의 관점이다. 근대와 동시대를 구분 짓는 특이성, 더 나아가 모든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는 특이성, 현대 문명의 특이성은 통일된 전체성으로부터 개체를 더욱더 독립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그것이라는 작가의 관찰에 우리의 감각을 집중시켜야 한다.

 

서구화나 현대화라는 말은 지고의 선인 것마냥 우리 뇌리에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다. 서구화, 현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숭상하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인식시키는 데 있어서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반대급부의 대가도 지불해야 했는데, 그것은 황금주의, 기회주의, 물신(物神), 개인주의적 이기심,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나타났다. 서로를 잇는 전체적 통일성의 상실이야말로 현대라는 시대가 앞으로 갚아가야 할 영원한 정신적 채무인 셈이다. 전체적 통일성(total integrity)이 상실된 시대는 개인의 치밀한 자기 방어만이 유일한 삶의 형식이 된다. 손종준은 이 부분을 못내 아쉬워한 것이다. 은빛의 눈부심이 외부로 찬연히 산란되지 못하고 안으로 갇혀버리는 알루미늄의 투박함은 자기 방어를 가까스로 해내는 우리의 불안함을 증폭시켜 표현해준다. 솟아오른 볼트와 너트의 결합은 마치 장미 가시처럼 애처로운 자기 방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심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캔디드 카메라(candid camera)라는 미덕을 송두리 채 버리면서까지 연출사진의 자기 표현을 극단적으로 감행했다. 사진에 등장하는 모델의 삶과 미래로의 예측까지 무시하면서까지 배우가 아닌 일반인에게 자기 주관의 극한의 구석까지 대신해서 표현하라고 요구한 셈인데,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이 세계 해석의 확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위적 조치'가 어째서 탄생했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간략하게만 생각하고 지금부터 신작이 어떠한 경위로 태어났는지 검토해야 한다. 작가의 2013년 신작은 미디어가 지니는 위세의 속성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돌파하려는 작가의 실험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개의 작품이 메인 이벤트처럼 자리하게 된다. 첫 번째 작품은 다소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구동되는 작품으로서 키네틱 아트의 속성에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의 성격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있다.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에서 첫째로 모터 동력이 원반을 회전시킨다. 원반에는 모스 부호(Morse Code), 즉 20세기 초에 최초로 사용되었던 군사적 전파 신호가 탑재되어있다. 이 작품의 외부로 TV 모니터가 설치되어있고 이 모니터에는 실시간 뉴스 방송이 상영된다. 이때 작가가 고안한 메시지인 모스 부호는 뉴스 방송을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방해하거나 혹은 모스 부호가 빛으로 변환되어 모니터 화면의 방송을 관람객의 감상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이탈시킨다.

두 번째 작품도 마찬가지 기제를 활용한다. 작가가 고안한 설치작품은 분명히 모니터의 화면을 관객에게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 맞는데, 이때 모니터 화면을 가로막는 불투명 유리가 화면 앞에서 전후를 반복적으로 운동하면서 관객의 시야에 정보를 제공하다가 일순 정보를 차단시킨다.

 

미디어는 20세기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근세의 회화나 근대 사진의 작품과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그것이 옛날 회화이든지 요즈음의 미디어이든지 정보의 제공이라는 현상은 일방적 방향으로 무조건적으로 흐른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이다. 정보를 유출시켜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제공자의 이득과 신념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요소이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가 과거에 비해서 위험한 것은 일반대중의 사실판단은 물론 가치판단까지도 아주 능숙하게 조절하고 조장할 수 있는 파워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체의 실존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중한 세계관의 형성을 저해한다. 또한 대중의 원하는 방향이 미디어에 작용되는 일도 실로 요원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더욱 안 좋은 것인데 현대의 매체, 즉 미디어가 지니는 몰입성은 개인의 사회에 대한 관계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대화나 교류를 통해서 주고받는 관계성이야말로 사람을 성숙시키는 끝없는 인생의 과정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기본적 인간 조건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체계로 단축화시키고 편익화시키는 것이 미디어가 파생시킨 현대 인간의 비극이기도 하다. 작가는 정보의 일방적 통행, 심각한 개인주의화, 이로 인한 개인의 미성숙의 연속적인 사회역사적 흐름을 중차대한 문제의식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어 중에 '히키코모리'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은둔형 외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문제이고 서구를 비롯한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인을 단연코 핵가족화, 정보통신의 발달, 취업문제 등 도시화와 현대화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그것은 상실감과 자기모멸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피부와 피부, 손과 손, 정서와 정서의 직접적 교감이 점점 귀해지고 드물어지는 시대이기도 하거니와 TV나 온갖 미디어의 현란한 속도감과 스펙터클한 감각은 휴머니즘의 가치를 너무도 손쉽게 망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이 유쾌하거나 경쾌하다 못해 유머러스한 발상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작가의 고민은 사실 진중하기만 하다. 현대 그 자체를 상징화하고 있는 미디어의 화면에 최소한의 개입과 중재를 통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전광판의 직접적 메시지를 반투명 유리로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수많은 해석과 반응이 따를 것이다.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나는 이렇게 본다. 우리는 도시화와 현대화까지 받아들였다. 그것이 좋고 싫고의 가치판단도 보류한다. 그것까지 받아들인다. 그리고 양극화와 세대, 지역, 종교, 인종 간의 격차와 괴리는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까지도 받아들이자.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이란 것은 있다. 작가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예술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모든 사회현상의 문제를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재단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때조차 버릴 수 없는 한가지는 예술은 포스트 휴머니즘을 위한 마지막 메시지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예술이라는 인문적이며 미적인 장르 자체도 제도와 권력의 기호에 맞게 일방적 통행을 강요 받을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특히 우리처럼 과거와의 단절을 감행하고 서구의 스탠다드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사회에서는 예술과 예술가의 태도마저 서구의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현재에 대화를 거는 태도 하나만은 우리의 총체적 문제와 발단을 되짚어내는 지향성을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장기적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좋게 작용하는 순행의 법칙을 이어온다는 낙관적 믿음이다. 이 말은 부정에는 희망이 없다는 말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다만 장기적 합목적성이라는 말의 전제는 현재를 끝없이 좋게 수정해가려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작가는 부정적 비판보다는 긍정적 개선을 원한다. 따라서 작가의 세계는 소통과 교류, 인간적 휴먼 터치의 활성화를 작품으로 개진시키려는 사고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손종준: 그들(?)이 겪는 아픔, 우리가 느끼는 공감

 

고동연(미술평론)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정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성시되었던 노동력은 점차로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며 변화된 경제적인 지형도는 점차로 확산되어가는 우리사회의 불행 증후군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또한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각종 상업화된 매체나 마케팅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이건 부정적인 의미에서이건 우리사회가 아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자신이 만든 ‘자기 방어적인 기재’들을 모델로 하여금 착용하게 하고 이를 사진으로 기록하여 온 손종준의 경우에도 각종 장애나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다고 여겨지는 소외의 문제를 다룬다. 날카로운 메탈류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을 착용하고 있는 사진 속 이미지들은 일종의 보조도구들을 신체에 부착한 장애인들을 연상시킨다.

 

영어로는 (Self) Defensive Measure, 그리고 한국어로는 ‘자위적인 조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굳이 무엇인가를 신체에 두르거나 들고 있어야만 자신이 외부의 각종 요소들로부터 방어 될 수 있다면 적어도 손종준의 사진에서 모델들은 독자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들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도구가 아니라 ‘조치’라고 해석되는 measure는 주어진 보조물체가 완벽하게 일을 수행해 간다기 보다는 일종의 임시방편이나 그야말로 조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손종준의 사진에 등장한 신체적으로 보조물들이 필요한 모델들은 인문과학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자아의 이미지보다는 타자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손종준이 말하는 타자의 상태나 정체성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지속해 오고 있는 <자위적인 조치> 시리즈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인물들이 도구를 착용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인물은 매우 직접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닌 듯이 보인다. 반면에 그리스의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포즈를 하고서 머리와 신체의 상단부에 작가가 직접 제작한 특유의 자위적인 장치를 착용한 이도 있다. 당당한 자세를 취한 그의 자태 때문에 특수한 장치를 부착해야만 하는 자칭 ‘타자화’된 처지보다는 착용 후 사진에서 부각된 공격성이 눈에 띈다. 실제로 메탈로 만들어진 부착물의 군데군데에는 송곳과 같이 날카로운 것들이 튀어나와 있다. 또한 양복을 입고 거리 중앙에서 메탈로 된 거대한 구축물을 착용하고 찍은 사진도 있다. 이러한 경우 괴기한 장치를 입고 서 있는 자칭 ‘장애인의‘ 모습은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저항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신체적이거나 내면적인 결함들 또한 쉽게 시각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아니 작가가 제작한 유사 의료 기구를 착용하고 포즈를 취하는 이들의 장애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가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것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장애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특정한 신체적 장애자나 정신적 장애자가 아니라 일반인들로까지 확대해서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 열등감, 약점 등을 다루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이와 연관하여 2013년 쿤스트독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보다 개념적인 작업들은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를 보다 보편적인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타마스쿨에서 유학한 작가는 일본식 은둔형 외톨이를 암시하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인바 있다. “나는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희가 나에 대해서 모두 알기를 원하지는 않아.”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극도로 자신을 폐쇄적인 공간에 침잠시키는 일본식 외톨이가 등장한다. 톱니바퀴와 같이 맞물려서 돌아가는 기계, 모스 부호를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기계, 은둔형 외톨이가 세상을 행해서 쏟아 냈을만한 문구들, 그리고 기계 드로잉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들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장애인’의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회 모델을 기계에 비유하고 그러한 사회적 모델이 강요하여온 개인의 사회화를 비판하고 있다. 각각의 톱니바퀴는 전체 기계의 구성인자로서 끝임 없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와 같이 개개의 톱니바퀴가 떠밀려서 특정한 방향으로 특정한 속도로 움직이게 되는 상태는 개개인들이 사회의 부품정도로 한정되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연상시킨다. 이와 연관하여 모스 부호와 같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거나 소통되기 힘든 상태는 한편으로는 은둔형 외톨이의 병리적인 상황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병리적인 상황이 결코 한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과격한 사회화의 과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손종준의 오브제, 그리고 오브제를 가지고 찍은 인물들의 사진은 매우 복합적인 사회비판적 시선과 우리 시대에 자주 거론되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상처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일종의 병리적인 현상을 예술이 다루는 과정에서 각종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단 손종준의 작업이 인간의 신체적인 장애나 아니면 보편적인 열등감, 장애 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고민해 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종준의 잘 만들어진 오브제와 사진들은 장애와 같은 문제를 다루기에 지나치게 시각적으로 완성되거나 세련된 인상을 준다. 실제로 그의 사진 작업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의 ‘장치’들이 일차적으로 관객을 끌어당기게 된다. 그런데 매끈한 메탈로 만들어진 소재들은 개개인들이 처한 소외의 상황을 정서적으로 전달하기에는 지나치게 말끔하며 섹시하다. 잘 만들어진 흑백의 사진도 유사한 매력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닌다. 그가 광고나 패션 산업계의 러브콜을 받게 되는 것도 바로 그의 작업이 지닌 쇼킹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세련된 특징 때문일 것이다.

 

손종준의 작업이 지닌 미학적인 특징을 차체하고라도 인간의 두려움이나 약점을 소재로 삼을 때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신체에 일종의 보조기구를 덧붙인 그의 작업은 아무래도 보는 이들에게 장애의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매우 연민어린 의도(우리 모두는 넓은 의미에서 장애인일 수 있으며 이를 규정하고 암암리에 편가름 하는 시선들 자체가 더 문제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장애는 신체적으로 부자유한 이들에게 결코 은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만약 손종준의 작업이 광범위한 장애를 다루고 있다면 실질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올바른 예우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반대로 그가 다루고 있는 장애의 문제가 매우 실질적인 것이라고 해도 문제가 발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과연 그의 작업이 이들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보조기구를 착용한 참여자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안정감을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로부터 파생되는 각종 문제점들이 결코 손종준의 작업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부분 사회 비판적인 소재를 연민어린 입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과제이기도 하다. 즉 예술가들이 특정한 매체가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인 즐거움의 영역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건드리게 될 때마다 예술가들은 유사한 문제점들에 봉착하여 왔다. 따라서 손종준의 보조기계와 사진들이 보다 깊은 의미에서 사회적 문제점들과 장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과연 예술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이에 필자는 작가에게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개인적인 소외의 문제를 떠나서 보다 큰 사회적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작가는 누구의 장애를 다루어야 하는가? 원컨대는 작가가 추상적이고 미학적인 입장에서 잠깐 벗어나서 우리 시대 개개인이 지닌 열등감과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럽거나 불만족한 상태를 보다 면밀히 관찰하고 이를 복합적으로 구현해 내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 개인적인, 공동체적인 변화를 다각적인 매체들을 사용해서 구현해 보았으면 한다. 이를 통해서 “자위적인 조치”시리즈가 지닌 보다 복합적인 의미가 더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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